
짓는 힘
1847년, 컴퓨터도 디젤 엔진도 중앙 계획도 없던 한 나라가 단 1년 만에 깐 철도는 대부분의 나라가 한 세대 동안 놓은 것보다 길었다. 영국은 그해 GDP의 8% 가까이를 철도에 쏟아부었다. 철도망은 10년 사이에 네 배 넘게 늘었는데, 그 가운데 정부가 계획한 구간은 한 곳도 없었다. 노선 하나, 회사 하나마다 민간이 내린 판단이 쌓여 철도망이 되었고, 그 철도망이 나라를 새로 빚어냈다. 그 영국이 지금은 고속철도 한 노선에 17년의 세월과 468억 파운드를 쓰고도 단 1마일도 개통하지 못했다. 힝클리 포인트 C 원전은 비용이 당초 추정치의 두 배를 넘어섰고, 완공은 2030년으로 밀렸다. 영국 산업계가 내는 전기요금은 국제 비교에 흔히 쓰이는 28개국 가운데 가장 비싸다.
에세이 #02
선택된 희소성
1978년에 미국인이 1인당 쓴 에너지는 그 뒤 어느 해보다도 많았다. 이후 미국은 1인당 에너지를 5분의 1 가까이 덜 쓰면서도 통계상으로는 줄곧 더 부유해졌다. 성장 이야기치고는 기묘한 모양새인데, 지난 반세기 동안 모든 선진국 경제가 바로 이런 모양을 그려 왔다. 경제학에는 올라가는 도중에 멈춰 버린 나라를 가리키는 이름이 있다. 중진국 함정이다. 부유한 나라들이 빠진 곳은 그와 다른 함정이고, 이 함정은 스스로 판 것이다. 방정식의 세 요소 가운데 무너진 것은 에너지였다. 사람들이 에너지를 더 늘리지 않기로 선택했고, 그 뒤로는 에너지가 다시는 늘지 않으리라는 가정 위에 나머지 모든 것을 쌓아 올렸기 때문이다.
에세이 #03
가계의 맬서스
2006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은 국민이 아이를 낳게 하려고 약 200조 원의 예산을 들였다. 그렇게 해서 도달한 합계출산율은 0.72명, 서울은 0.55명이었다. 오늘날 부유한 나라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로 “먹을 것이 없어서”를 드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출산율은 관측 이래 가장 낮은 수준에 못 박혀 있고, 돈을 풀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돈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가 이 숫자를 정하고 있다. 1798년 영국의 성직자 토머스 맬서스는 『인구론』을 펴내, 인구는 언제나 식량 공급을 압박하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밭의 소출을 늘릴 수 있는 속도보다 빨리 불어나므로, 생활 수준이 조금 나아질 때마다 늘어난 입이 그 몫을 먹어 치우고, 기근과 질병과 늦은 결혼이 인구를 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까지 다시 끌어내린다는 것이다. 맬서스가 묘사한 세계에 한해서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해에 내리쬔 햇빛 말고는 기댈 것이 없던 경제에서 생산량은 땅에 묶여 있었고, 인구는 물리적 제약 가운데 가장 세게 조이는 제약에 눌려 있었다. 그러다 공기 중의 질소를 뽑아내 만드는 화학비료가 등장하면서 식량은 더 이상 한계가 되지 않았다. 맬서스의 논리는 살아남았고, 바뀐 것은 한계를 긋는 요인이었다.
에세이 #04
풍요의 연쇄
로밍 데이터 2GB로 해외에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면 누구나 아껴 쓰게 된다. 어떤 것이 유한한지 무제한인지는 실제로 얼마나 모자란지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크게 사람의 마음을 좌우한다. 같은 여행자에게 무제한 요금제를 쥐여 주면 휴대전화는 쉴 틈이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명소를 돌아다니며 음성 비서를 내내 켜 둔다. 자본을 어디에 둘지는 제약 안에서 정해진다. 사업 하나가 세워지면 그 덕에 다른 사업이 가능해지고, 에너지가 모자라 시작조차 못 한 사업은 거기서 뻗어 나왔을 다른 사업까지 모두 데리고 사라진다. 제약 안에 머무는 한, 제약이 없다면 무엇을 할지 제대로 그려 보기 어렵다.
에세이 #05
소유의 분배
2026년 7월 4일, 2025년 초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가 투자자가 되었다. 한 해 전에 통과된 법에 따라 연방정부는 아기 한 명마다 계좌를 열어 1,000달러를 넣어 주고, 이 돈은 미국 주식시장을 추종하는 저비용 펀드에 투자된다. 그 계좌들이 바로 이날 운용을 시작했다. 금액은 적어도 그 밑에 깔린 생각은 크다. 나는 이것이 2030년대 정치의 중심이 될 물음에 대한 답의 첫머리라고 본다. 나는 공급에 대해서는 낙관하고 분배에 대해서는 비관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2030년대 어느 시점에 조세를 통한 재분배가 시도될 것이고, 그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제 몫을 할 수 있는 길은 소유 쪽에 있다.